안녕하세요 민트롤로lifestyle입니다
오늘은 중국의 최초 황제 진시황에 대해서 포스팅 할게요~~
알아두면 효자정보~~
‘중국의 마지막 황제’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푸이(溥儀)**를 떠올립니다.
사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이며,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푸이인데요. 하지만 진시황의 통치가 워낙 강력하고 전무후무했기 때문에 “최초이자 마지막처럼 위대한 황제”라는 의미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진시황의 본명은 **영정(嬴政)**입니다. 기원전 259년,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자초는 당시 진나라의 왕자였습니다.
영정은 혼란한 전국시대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암살과 정치 싸움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출생부터 논란이 많았는데, 특히 진시황의 아버지가 진나라 왕이 되기 전 상인 여불위의 도움을 받은 점, 그리고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 등은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의혹입니다.
영정은 13세에 진나라의 왕이 되었고, 22세에 실권을 장악한 후 기원전 221년, 전국 7국을 모두 정복하여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칭하며 **진시황제(秦始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로써 ‘왕’이라는 기존의 호칭에서 벗어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황제'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진시황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도입하여 지방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고, 전국을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혼란한 전국 시대를 지나오면서 각국의 문자가 달랐지만, 진시황은 **소전(小篆)**이라는 글자를 통일 문자로 채택했습니다. 무게, 길이, 화폐 등도 통일하여 경제 활동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북방의 흉노족 침입을 막기 위해 기존 성벽들을 연결하여 초기 형태의 만리장성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수많은 백성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한 대표적인 예로, 후대에 진나라 멸망의 한 원인으로 지적됩니다.
진시황은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도로를 건설하고, 물류와 군사 이동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중국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묶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진시황은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불로불사의 약, 즉 영생의 비약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 사자를 보내거나 도사들을 찾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이 **서복(徐福)**인데, 그는 일본과 한반도 등 **동쪽 바다에 신선이 살고 있는 ‘불로초의 섬’**이 있다고 말하며 수천 명의 동남동녀(청소년들)를 데리고 바다로 떠납니다.
그 후 서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 전설은 **"서복이 일본에 정착해 문명을 전파했다"**는 일본과 한국의 민속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이 일화는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비이성적인 탐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진시황은 법가 사상을 중심으로 통치를 했고, 그 외 다른 학문(특히 유가 사상)을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따라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역사서와 시가, 철학서 등을 대거 불태우는 **‘분서(焚書)’**를 시행했고,
그 이듬해에는 반대하는 유학자 460여 명을 생매장(‘갱유’, 坑儒) 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진시황이 사상의 통일과 권력 강화를 위해 폭압적인 수단을 동원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진시황이 왕으로 있던 시절, **연나라의 태자 단(燕太子丹)**은 진시황을 제거하기 위해 자객 **형가(荊軻)**를 보냈습니다.
형가는 연나라의 지도와 진나라의 반역자 **범수(樊於期)**의 머리를 바치는 척하며 진시황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진시황 앞에서 갑자기 단검을 꺼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진시황은 몸을 피해 도망치며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일화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객 이야기 중 하나로, 나중에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영화 *영웅(Hero, 2002)*도 이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죠.
진시황이 한 지역을 순행하던 중, 어느 성의 문이 열리지 않자 신하들이 난감해했습니다.
그때 진시황은 성문 옆에 있는 커다란 돌을 칼로 세게 치며 외쳤습니다.
“내가 천하의 황제다! 문을 열라!”
그러자 이상하게도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전해지며, 그 돌은 **‘성문석(城門石)’**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황제의 권위가 하늘의 명령처럼 절대적이다라는 이미지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퍼졌습니다.
진시황 말년, 기이한 천문현상과 예언서의 등장이 잇따랐습니다.
어떤 서적에는 “호(胡)라는 자가 진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글귀가 있었고, 이를 본 진시황은 ‘호(胡)’라는 성이나 이름을 가진 자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진나라를 멸망시킨 이는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였죠.
이 이야기는 진시황이 예언에 집착하며 불안 속에 말년을 보냈다는 역사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진시황의 무덤은 중국 시안(西安) 근처 릉산에 있으며,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특히 **병마용(兵馬俑)**은 진시황릉을 지키는 수천 개의 병사 조각상으로, 1974년 우연히 발견되며 세계적인 유산이 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무덤은 아직도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로서, 혼란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한 인물입니다.
그의 강력한 통치는 단명한 진나라의 몰락을 불러왔지만, 문자, 도량형, 도로망, 행정체계 등은 후대의 모든 왕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이 하나의 국가로 존재할 수 있었던 기초를 닦은 사람이 바로 진시황입니다.
포스팅을 마치며...
마지막 황제 푸이도, 최초의 황제 진시황도 영화로 많이 제작되었는데요.
중국의 특성상 방대한 스케일로 병마용과, 만리장성도 표현하였지요.
진시황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동시에 공포, 폭정, 불안, 미신 등 다양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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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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