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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종대왕은 갑자기 장영실을 파면시켰을까요?(장영실 퇴출)

위인,일화,유명인물

by 민트 롤로 2025. 4. 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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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튜브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



안녕하세요  민트롤로lifestyle입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 세종대왕과 천민출신의 장영실의 브로맨스를 아시나요?
세종대왕은 천민 출신의 장영실을 그 당시 신분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신뢰하여 등용하였고, 장영실은 세종대왕이 말하는 모든 것들을 척척 발명해냈는데요. 당연히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신하들에게는 눈에 가시였지요.
사사건건 이유를 대며 장영실을 많이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꿋꿋이 발명품을 만들어갔는데요.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브로맨스 영화'천문'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 내 꿈을 자네가 다 이뤄준 셈이지. 자네가 만들지 않았으면 그게 내 꿈인지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나에겐 자네같은 벗이 있지 않은가."
정말 감동적이고 울컥하는 대사와 장면으로,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엿볼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종대왕이 갑자기 장영실을 파면할 수 밖에 없었는지 포스팅 할게요.
 
알아두면 효자상식~
 
장영실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천문, 시간, 측량,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명을 이루어내며 조선 과학기술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정3품의 품계를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총애하던 세종대왕이 어느 날 갑자기 장영실을 관직에서 파면시켰다는 기록이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과연 세종대왕은 왜 장영실을 퇴출시켰을까요?


장영실은 누구인가?

장영실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대를 대표하는 발명가이자 과학자입니다. 그는 원래 노비 출신이었지만, 세종의 눈에 띄어 궁중에 발탁되었습니다. 이후 혼천의(천체 관측기구), 자격루(자동 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측우기(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구) 등을 발명하며 조선의 과학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그 누구보다 신뢰했고, 신분의 장벽을 허물고 중용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특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장영실의 갑작스러운 파면입니다.


역사적 기록: 장영실의 파면

 

출처: 유튜브(세종이 온천여행 때 타는 가교가 부서짐)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은 1442년,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됩니다. 해당 기록에는 장영실이 왕이 타는 가마(가교)를 제대로 정비하지 않아 세종이 크게 다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장영실을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장영실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과실’치고는 너무 큰 결과를 낳았고, 세종 역시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을 그렇게 쉽게 내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뒤에는 어떤 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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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적 배경: 신분의 벽과 사대부의 반발

장영실은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천민 출신으로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대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장영실이 관직에 오르자,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노비가 어떻게 국가 과학을 담당하냐”는 불만이 퍼졌다고 전해집니다.
장영실이 만들어낸 성과가 아무리 탁월해도,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장영실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겼던 것은 사실입니다. 세종 또한 이런 정치적 압력을 느끼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 세종의 건강 문제와 심리적 부담

세종대왕은 만성질환에 시달렸고, 특히 말년에는 시력과 체력 모두 약해져 국정 운영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마 사고로 인해 더 큰 부상을 입었다면, 세종 입장에서는 심리적으로 큰 충격이었을 수 있습니다. 신뢰하던 장영실에게 실망감도 컸을 것이며, 건강 악화와 감정적인 동요가 합쳐져 예기치 않은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3. 조용한 명예 퇴진? 세종의 보호책일 수도

일부 역사학자들은 장영실의 파면이 실제로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을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즉, 외부의 압력을 무마시키고 장영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되, 그를 생명이나 명예에서 완전히 몰락시키지 않기 위해 파면이라는 절충안을 택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파면 이후 장영실이 유배되거나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의 이름은 이후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이는 조선 시대의 보통 파면 사건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며, 오히려 세종의 배려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4. 장영실의 실수는 과연 실수였을까?

또 하나 흥미로운 가설은, 가마 사고가 실제로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입니다. 장영실을 제거하고자 했던 보수 세력이 일부러 장영실의 책임으로 몰아간 정치적 사건일 수 있다는 주장이죠. 세종 역시 진실을 알았지만, 정치적 안정과 장영실의 안전을 위해 침묵했을 수 있습니다.
 

살펴보기~

장영실을 괴롭힌 사람들은 명확하게 실명으로 남아 있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역사적 정황과 기록을 바탕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 인물들과 세력이 있습니다. 주로 사대부 관료층, 즉 양반 유학자 출신 관리들이 장영실을 비판하고 견제한 핵심 세력이었습니다. 그 이유와 관련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대부 관료들 – 신분 질서를 중시한 보수 세력

 

출처: 유튜브 ( 천문中 관료들)



조선은 철저한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운영된 나라였고, 특히 **사대부(양반 관료)**는 신분제와 유교 질서를 중시했습니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들과 마찰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천재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 해도, 당시 유교 사회에서 노비가 고위직에 오른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었습니다.
사대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장영실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 신분 파괴의 상징: 노비 출신이 정3품 관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위협적으로 느꼈음.
  • 비문(非文)의 위협: 과학 기술은 문(文), 즉 유교적 지식보다 낮게 여겨졌음. 장영실은 글보다는 실용 기술로 출세했기에 전통 사대부와 상반되는 존재였음.
  • 왕의 총애를 독점: 세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으면서 다른 신하들과의 갈등이 커졌을 가능성.

이러한 사대부 세력은 이름 없이도 집단적으로 세종에게 장영실의 과실을 들춰내며 탄핵을 건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허조(許稠) – 세종 시대 대표적 보수 관료

장영실과 직접적으로 대립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종 시기 보수적 관료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허조입니다. 그는 성리학에 철저한 인물이었고, 신분 질서를 지키려는 태도가 강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허조가 과학이나 예술보다는 유학적 도덕성과 제도 유지를 중시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런 인물이 장영실처럼 파격적으로 신분을 뛰어넘은 사례를 좋게 볼 리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며, 장영실 탄핵이나 견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3. 유향소 및 향반층의 반감

중앙 관료 외에도 지방의 향반(鄕班), 즉 지역의 양반 계층도 장영실과 같은 인물의 출현에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종은 지방의 수재보다 노비 출신 기술자를 발탁해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향반층에게 왕권 강화로 인한 불안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장영실과 같은 ‘특권 없는 출신’의 출세가 자신들의 권위를 흔든다고 보았고, 중앙 정치에 압력을 넣는 방식으로 세종의 인사정책에 반감을 드러냈을 수 있습니다.


4. 정확한 이름이 남지 않은 이유

흥미로운 점은, 장영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인물들의 실명이 거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는 세종이 장영실을 최대한 보호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신뢰했기에, 그의 반대자들의 이름을 실록이나 기록에 남기지 않도록 했을 수도 있으며, 정치적 반발을 억제하려 절충한 결과가 ‘파면’이었을 수 있습니다.


역사 속 미스터리, 그러나 그의 업적은 영원하다

장영실을 괴롭힌 자들은 '사대부 중심의 성리학 사회'
요약하자면, 장영실을 괴롭힌 세력은 특정 인물보다도 조선 초기 보수적인 사대부 관료층 전체였습니다. 그들은 신분 질서와 유교적 가치 체계를 흔드는 장영실을 경계했고, 결국 정치적 압력과 권력 균형 속에서 장영실은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이 남긴 업적과 과학 기술에 대한 열정은 조선뿐만 아니라 한국 과학사의 큰 자산으로 남아 있습
니다. 
 
장영실의 파면은 조선 역사 속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세종의 정치적 고뇌, 조선 사회의 신분제 구조, 당시 사대부의 권력 다툼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과학적 업적과 조선 기술 발전에 끼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영실은 물러났지만, 그의 발명은 지금도 한국 과학사 속에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포스팅을 마치며....
 
세종대왕은 신분이 미천한 장영실을 중용하고, 지방의 수재보다 노비출신을 발탁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는 기술자들이 가진 뒷배경보다 실력을 신뢰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세종대왕만의 파격적인 행보였던 것 같아요.
우리 사는 사회도 겉으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회적 분위기로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미미하게 신분의 차이를 의식하게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브로맨스를 기대할 수 있는 일들도 있겠죠?
 
오늘도 민트롤로lifestyle의 티스토리블로그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갑니다.~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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